위로.

2010/03/09 11:00




가끔은 타인에게서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완전한 남에게서.



하지만 완전한 타인에게 위로 받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요즘은 인터넷의 많은 글들에게 위로 받고 있다. 사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이게 의외로 효과가 좋다.



나는 힘든일일수록 친한 사람보다는 덜 친한 사람을 찾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더 편하다.
특히 나에 대해서 잘 모를수록 더더욱 좋다. 친한 사람에게서 받는 위로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는 위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부터도. 어떻게 보면 가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제는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희에게 연락을 했다.
희는 나하고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과거형이 되어버렸군. 단둘이 만난적은 한번도 없었다.
희는 내 친구의 친구였다. 내 친구와 같이 두세번 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첫 만남때부터 다른 친구에 비해
우리 둘은 좀 빨리 친해졌다. 문자도 간간히 주고 받기도 하고 내 친구와 내 친구의 친구와 희와 나와는
사금회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희는 남들이 알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일을 무지 시키는 회사다. 특히 어제같은 월요일은
많이 바빴을 텐데. 내 문자를 받고 7시에 퇴근을 했다. 그리고 마포에 왔다. 고마웠다. 여기까지 와주고.
일도 많은데 다음날로 미뤄두고 내 문자를 받고 당연한듯 와준 것이다.


마포에도 새마을 식당이 생겼다. 거길 갔다. 소금구이 하나 항정살 하나 소주 하나 주세요.
항정살은 먹어본적이 없다고 했더니 희는 놀랜다. 아주 맛있단다. 어쩐지 다른 고기들보다 이천원이나 비쌌다.
처음에 항정살이 나왔을때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 스타일이 아니야.
그런데 먹어보니 오. 괜찮은데. 맛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고 희는 나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지만 술이 좀 많이 들어가야 말이 많아지는
나는 취하면 이야기 해준다고 했다. 고기 이인분에 소주 하나를 비우고 새마을 식당의 대표메뉴라 할수있는
7분 돼지김치를 시켰다. 여기다가 소주한병 더 할까? 콜.

두번째 소주를 먹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술이 받는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건 오늘 나는
달리게 되겠구나 라는걸 뜻한다. 신촌이 아니라는게 순간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소주를 먹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취했다. 희는 멀쩡했는데 나는 자꾸 말이 꼬였고 얼굴이 붉어졌으며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야. 옛날에는 말이야. 그러니까 20대 초반만 해도 말이지. 헤어졌네 실연당했네 하면서 친구들 만나서
소주한잔 하고 말이야. 울고. 그런게 너무나 당연한거 같았는데. 나이를 먹나봐. 친구들 막 불러서 괜히
술마시고 울고 위로 받고... 그러고 싶지가 않아지는거야. 언제부턴가.. 참 한편으론 다행이면서 그래도 내가
나이 먹는구나 라는 생각 드니까. 씁쓸하기도 하네."

그랬다. 나이를 먹으니까 좀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되는게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서 일까? 아니면 몇번 겪어왔던
반복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젠 그냥 많이 무덤덤해진 걸까.

"울지 말라고 했는데. 울어. 차라리 야 울어 울어."

만나기 전엔 너 오늘 울면 죽을줄 알아 라고못박아 놓고. 뭐냐..


아무튼 취해서 그런건지 실수를 했다. 왼쪽에 있던 물컵을 떨어트렸고 물컵이 떨어지면서 물이 사방으로 튀었는데
바로 옆 테이블 내 옆자리쪽에 앉으신 남성분에게 특히나 많이 튀었던 것이다.
아. 왜 실수 안하나 했다. 아 정말 민망하고 미안했다. 계속 남성분에게 어쩔줄 몰라서 사과를 했는데 눈으로
물이 들어가셨는지 연신 눈만 닦고 비비고 별 대꾸가 없으셨다. 그 테이블의 여자분은 뭐가 좋은지 깔깔거리면서
괜찮다고 좀 한마디 하라면서 웃고 계셨다. 결국 괜찮아요 라고 하긴 했는데 정말 안괜찮아 보였다.
... 죄송합니다. 그럴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그 남성분이 아이폰 사용자라서 검색하다가 내 블로그에 오시게 될수도
있으니 이자리를 빌어서 다시 또 죄송합니다.


민망하고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그래서 얼릉 나왔다. 2차를 가자. 2차는 버들골이다. 요즘들어 자주가는 버들골.
해삼을 시켰다. 난 자꾸 멍게와 해삼이 헷갈린다. 멍게가 해삼같고 해삼이 멍게 같다. 그러니까 해삼과 멍게는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 해삼에게는 멍게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고 멍게에게는 해삼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그냥 내 생각이다.


여기서 또 실수를 했다. 나는 어제 반팔티를 입고 가디건을 입고 코트를 입었다. 버들골에선 코트를 벗어두고
가디건만 걸친체 있었는데 중간에 편의점도 다녀왔다. 나는 어제 카드지갑으로 쓰는 정말 카드만 딱 들어가는
작은 파우치가 있는데 거기에 카드와 현금을 조금 넣어서 가지고 나왔다.
2차에서 해삼과 소주 한병을 비우고 나가는데 정말로 카드지갑이 없어졌다. 취한 나는 많이 당황했다.
아까 편의점도 다녀왔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지?
희는 괜찮아 괜찮아 내가 낼게. 했지만 나는 너무나 무안했다. 도대체 어디 간거야.
취하지만 않았다면 분명히 찾았을 카드 지갑은 가디건 주머니에 있었고 나는 코트주머니와 가방만
뒤적거렸던 것이다. 1차는 희가 쏴서 2차는 내가 쏜다 하고 데려갔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야.


나오면서도 계속 어떡하지 카드 정지시켜놔야겠다. 어떡하지 어떡하지만 연발했고 희는 웃으면서
"걱정하지마. 집에가면 나온다. 집에가면 분명 나와."
"아니 잃어버렸는데 집에가면 나온다니 말도안돼."
"글쎄 분명히 집에 가면 나와."


.. 정말 집에가니까 나오네. 하아.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오늘 아침에 사촌언니와 통화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고 진상 그 자체란다. 차라리 처음부터 돈 없다고 니가 좀 술 사라 했으면 괜찮았을텐데
이건 모 내가 쏜다 해놓고 결국 계산할때 지갑없다 수쓰는거 아니냐면서..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렇게 보일만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의도 아니였다......


아무튼 나는 희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집에와서 문자로 연신 담번엔 크게 쏜다고 미안하다고 굽신거렸다.


집에 와서도 나의 진상짓은 계속 됐다. 나는 술이 취하면 음악을 듣는다. 음악만 조용히 들으면 되는데
문제는 나도 모르게 따라부른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언니가,
"어제 너 술마셨어? 많이 마셨어?"
"어. 친구랑 둘이서 세병정도? 아 머리아퍼 죽겠어."
"어쩐지 어제도 니 방에서 음악소리가 흘러 나오더라. 웃겨죽겠어. 술만 취하면 왜 그렇게 노래를 불러?"

..........마루에서 주무시는 아빠 지못미.


아침에 일어나니 컴퓨터 옆에 캔맥주 두개가 찌그러져있다. 그렇게 먹고서 집에와서 캔맥주를 또 먹고
취해서 잠이 들었나보다. 진상이다 진상.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머리는 아프고 잠은 쏟아지고 정신은 멍하다. 그래도 마음속에선 무언가 씻겨져 나간 기분이다.
어제의 술자리가 나는 너무나 즐거웠다. 나를 잘 모르는 타인에게 위로받기. 성공이다.
하지만 이젠 타인이 아니다. 친구니까. 어제부로 희는 많이 친한 친구가 됐다. 그전에도 친구긴 했었지만
서로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약간은 남인듯한 긴장감이 있었는데 그게 사라졌다. 좀 아쉽긴 하지만 뭐 그래도
친한친구가 하나 더 생긴거니 결과적으론 더 좋은거다.


이제 다음에 힘든일이 있을땐 누굴 찾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긴. 힘든 일이 있을때 위로 받을 생각부터 하다니. 힘든 일이 안생길 생각을 해야지.


나도 누군가에게 완전한 타인이 되어서 위로 해주고 싶다.

그거 참 괜찮은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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