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 빈집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奇亨度, 1960-1989) 나는 이제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럴 경우 모든 굳은 체념들이 살아날 것이다. -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중에서> - 예술가에게 뛰어넘기 힘든 신화(神話) 혹은 콤플렉스라면 아마 이런 종류의 것들이리라.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자신의 죽음으로 불멸의 금자탑을 완성하고 싶다는 유혹은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희망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시대는 모든 시인이 릴케처럼 장미 가시에 찔려 백혈병으로 숨지도록 하지도 않을 뿐더러 혁명의 시기에 소총을 들고 전장을 누비다 장렬하게 전사할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침상에 누운 채 병들어 잔뜩 주름진 얼굴에 경우에 따라서는 추한 오명(汚名)을 남긴다. 우리나라에서 시(poem)는 낭만주의(romanticism)의 영향과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적 전통 속에 풍류의 한 가지 혹은 젊음의 광기를 담은 그 무엇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시인이란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 청춘의 상징 혹은 시대와 불화하는 그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죽은 시인에 열광하는 까닭이 혹시 그가 더 이상 우리를 배신할 가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안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1980년대도 저물어가던 어느 해 세밑 몇몇 친구들은 공장으로, 대학으로 떠나고 홀로 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그 무엇으로도 삭이지 못했다. 그때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이 우연하게 손에 들어왔다. 아픈 마음을 다스리는 약으로 시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1960년 2월 16일 생의 시인, 기형도. 그는 나보다 꼭 10년이 위이다. 생년의 끝이 영(0)년으로 끝나는 사람들에게 숙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번외자(番外子)의 설움 같은 것이다.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가도가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기형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기형도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친구 한 명이 있다. 그 녀석은 뒤에서 두 번째였지만 그의 모친에게 그는 항상 막내보다 더한 막내였다. 기형도의 경우도 이와 같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에게 선천적으로 여릴 수밖에 없는 가정적 환경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라고 추측된다. 중학교 때부터 시에 관심이 있었던(1975년 그의 바로 손 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공부도 잘했던지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서 잠시 방위로 군복무를 한 뒤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 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9년 시집을 준비하던 중 뇌졸중으로 죽었다. 이상이 그의 짧막한 생애에 대한 정리이다. 1960년에 태어나서 1989년 3월 7일에 죽었으니 그가 세상에 나서 공기를 호흡한 시간은 다 합쳐 봐야 만 29년에서 엿새가 빠지는 기간이었다. 요절(夭折)이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죽음이었다. 기형도가 1980년대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은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주변에서 너무 가까이 태어났다가 죽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들은 아직 풍문이다. 그가 문학적으로 정리되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이었던 원재길의 회상을 보면 기형도가 1980년대라는 엄혹한 터널을 지나면서도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 크게 공감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그는 철야 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했다가 형사가 찾아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듬해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생전의 그는 성실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어서 실수로라도 누구를 괴롭히는 일이 드물었으며, 늦도록 술을 마셔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얼굴이 심하게 붓는 걸 꺼려서 술을 많이 들진 않았지만 술자리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특히 문학이 화제라면 매우 즐거워했다. 휴일엔 밖에 나다니는 일이 없었는데, 아마도 어머니의 일을 도왔던 걸로 여겨진다. 집에서 기르던 새끼 돼지들한테 예방 주사를 놓았다면서, 주사기 바늘이 뼈에 닿는 순간 손목으로 전해지던 느낌을 들려주며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집안일 돌볼 거 다 돌보고, 친구들과 놀 거 다 놀면서도 학교땐 과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시간과 생활을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얘기가 되겠다. 사실 그가 복학한 1981년은 전두환 정권의 차가운 칼바람에 모두가 숨죽이지 않을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85년부터의 대학 생활이란 것이 경험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집회가 있는 날 강의실에 앉아 있거나 도서관만 지키고 있기에는 다소 민망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그역시 시대의 우울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집회마다 나가면서도 시험 성적 좋은 것이 기이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의 전 학년 성적표를 보면, 체육과 교련에서 B학점을 몇 번 받은 걸 빼곤 모조리 A다. 시험 기간을 앞뒤로 해선 도무지 얼굴을 대하기 힘들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절반은 부러워하면서 또 나머지 절반은 '비겁한 놈, 혼자만 공부 잘하다니' 하고 이상한 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었다. 스케치 솜씨가 대단했으며, 당장 가수로 나가도 밥 먹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노래를 잘했다. 직접 작곡한 노래를 선보일 때도 있었다. 레퍼토리가 차고 넘쳐서, 어느 해 여름에 대천 바닷가에 놀러갔을 땐 민박집 평상에서 혼자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노래했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참여한 까닭에, 그렇지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한 사람은 배회한 까닭에, 그들을 무시한 사람들은 무시한 까닭에, 억압하려 들었던 사람들 역시 어김없이 억압하려 한 까닭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데 기형도가 죽었다는 소식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실 기형도의 등장과 퇴장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가 처음 문단 데뷔를 하고, 첫시집을 내고 그리고 종로3가(사실 종로 3가는 기형도 이전에도 많은 시인들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김수영과 신동엽도 이곳의 구석진 술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어딘지는 나도 모른다.)의 허름한 극장에서 죽었을 때, 우리들은 몇 가지 풍문을 들었다. 하나는 그 극장이 동성애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란 것과 그가 어째서 심야의 그 극장에서 고개를 뒤로 꺽고 숨져야 했는가?하는 사실이 기묘한 씨줄날줄이 되어 풍문을 증폭시켰고, 그의 연애에 얽힌 이야기들이 또한 그의 전설에 먼지를 더했다. 소설가 강**씨와의 연애설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어쨌든 기형도의 시는 80년대의 많은 상처입은 청춘들에게 알수없는 위안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풋풋한 자기 성찰들로 가득했고, 따뜻했고, 외로와서 상처입었고, 그리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기형도는 대학 시절 따르던 형의 자살을 두고서 그의 죽음을 "형의 죽음이 나의 생활에 단순히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질 수 있는, 혹은 예술적 체험 세계의 확장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형도 전집』 「참회록」 중에서>라고 쓸 만큼 섬세하고 타산적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친우이자 문학적 동료였던 원재길은 기형도가 스스로의 스승을 보들레르(Baudelaire)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한국의 보들레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꼭 어울리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형도는 시적으로는 분명히 보들레르의 자식이라는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기는 하나 일반 독자들에게 그는 한국의 보들레르라기 보다는 '1980년대의 윤동주'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학대의 현장을 보여준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시는 보들레르와 같이 가학적인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자학적인 이미지들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우울을 노래했지만 기형도는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그것이 단순히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것도 아니요, 보들레르의 그것과는 다른 내면의 우울이었다. 기형도의 우울은 시대의 우울이자, 상처받은 양심과 청춘의 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형도의 시는 오히려 윤동주의 시와 닮아 있다. 오히려 기형도에게는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윤동주'로 비견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맞춰줄 줄 알고, 노래도 기똥차게 잘했고, 공부도 잘했고, 작곡까지 할 정도의 이 재기 넘치는 젊은 시인은 '보들레르의 자식'이었지만 그보다 대학에서조차 교련을 배워야 했던 '시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시대의 우울을 몸소 견뎌야 했던 시인이다. 백혈병 초기 증세를 앓았고, 한 쪽 귀는 거의 청력을 잃을 지경이었고, 고혈압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는 기자였다. 그의 온몸은 시대의 우울을 감지하는 촉수였고, 레이더였고, 그런 우울은 그의 정신과 육신을 상하게 했다. 그의 시 <그 집 앞>을 읽으면 어쩐지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집 앞'에서 한참 동안을 서성이던 내 젊은 날의 사랑이 떠오른다. 기형도의 데뷔 작품인 <안개>를 보자. 마치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영향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 시의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1982년 9월 25일 밤 1시. 기형도는 의문에 빠진다.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자답하기를 "그것은 우문(愚問)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 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 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있다'에 귀착한다."라고 한다. 앞서 기형도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보들레르"로 표현한 원재길의 표현을 맞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 점은 그대로 두고서라도 기형도가 보들레르를 자신의 시적 스승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의미를 둘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그의 시가 보들레르와 비교할 만한 성질의 시가 아니라는 뜻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어떤 인물인가? - 혁명붕괴의 해인 1848년 이후의 유럽 예술에서 우리는 환멸과 같은 어떤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민계급의 빛나는 예술적 시기는 끝났다. 예술가와 예술은 인간의 총체적인 소외, 모든 인간적 관계의 외화(外化) 및 물화(物化), 분업, 분해, 엄격한 전문화, 사회적인 연결의 불투명화, 개인의 증대되는 소외와 반항 등의 모순들과 더불어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세계로 진입하였다. 진지한 휴머니스트 예술가는 그러한 세계를 더 이상 긍정할 수 없었다. 그는 시민 계급의 승리가 휴머니즘의 개선을 의미한다고 더 이상 분명하게 믿을 수 없었다. - 예술을 위한 예술 (기본적으로 리얼리스틱하고 위대한 시인이었던 보들레르가 취했던 태도) 역시 통속적인 공리주의, 부르주아지의 무미건조한 일상업무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세계에서 상품을 생산할 수 없다는 예술가의 결의에서 생겨났다. <에른스트 피셔(Ernst Fischer), 『예술이란 무엇인가』중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 속에서 그를 '부르주아지가 예술가로부터 그의 위임장을 철회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 - 이러한 인식은 무한한 중요성을 가졌다 - 한 최초의 인물' 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부르주아라는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 세상을 향해 자신의 시(詩)를 토해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시장(가령, 그것은 대중mass일 수도 있고, 역사적 평가일 수도 있다.)을 겨냥한 것이었다.(1848년은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보들레르는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2년만에 탕진해버리고 혁명에 가담했었다.) 기형도가 그런 보들레르를 자신의 시적인 스승으로 생각했으며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중앙일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라는 칭호를 붙여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안개>로 돌아가서 '읍'으로 상징되는 기형도가 머무르는 시적인 공간은 아이들이 느릿느릿 새어나오고, 여직공은 겁탈당하고, 취객이 얼어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닌 것이다. 안개의 고장을 욕하며 떠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들의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그에게 '1980년의 봄'은 어떤 의미였을까? 박정희 유신 체제의 붕괴를 목격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입학한 대학 신입생으로서 경험한 1980년의 봄, 민주화 운동의 봄이자 미처 꽃 피워 보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그에게서 1848년 프랑스 대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보들레르의 영토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요절한 시인들에게 안도하는 이유는 그가 나이가 들며 보수화 되거나 오명을 남기게 될까 두려운 까닭에서이기는 하나 요절한 시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는 시인의 성숙해 가는 변모의 과정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형도는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시를 탐구했고, 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그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도피의 기록으로 남겨놓은 「짧은 여행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이르러 이한열의 어머니와 조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기록이던가. 기형도가 광주 5.18 묘역을 찾고서 남긴 글에는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서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이라고 적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에겐 허용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에겐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망명이었다면, 보들레르에겐 용납되었으나 기형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 그것은 타락이었다. 그가 내딛는 땅 어디에서도 그는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없었다. 도처에서 그는 안개에 둘러싸인 소읍을 발견했고, 그곳에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폐수 냄새, 오염된 사람들의 썩어가는 냄새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유중하(연세대 중문과 교수)는 "이러한 반성은 기형도로서는 미증유의 것이었다" 고 말하지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기형도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성하게 했고, 그는 마치 고독한 수도승처럼 시를 통해 낯선 기쁨과 전율에 젖고자 했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으려 한 것은 권태와 무기력이었다. 광주를 방문하기 전의 그는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고 말했던 조로(早老)의 젊은 시인이었으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서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 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一生)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 가" 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생의 주도권은 다시 그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길 소망했던 시인 기형도의 희망은 동성애자들이 상대를 물색하는 장소로 사용한다는 서울의 한 허름한 극장에서 멈춘다. 기형도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짧은 여행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 기형도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것은 시작 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이었다. 기형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인은 뇌졸중이었고, 보들레르는 뇌경색이었다. 세상의 아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촉수인 병약한 시인들에게 '시대의 우울'은 감내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 - [ 위험한 가계(家系) 1969 .. 기형도 ]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깍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 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에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우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지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리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선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바라기 씨앗 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서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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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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